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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거제여행: 흙을 밟으며 바다 내음 맡기
    공간산책 2020. 7. 19. 20:52

     

     코로나19로 휴가의 빈부격차가 사라진 때. 거제도로 4박 5일 여행을 떠났다. 제주도는 사람이 너무 많을 것 같아서, 육지는 너무 아쉬워서, 강릉은 너무 가까워서 등등 이유를 대보니 다들 인생여행지로 추천하는 거제도가 남았다. 해외도 좋지만 국내 여행도 튼실하게 여행하기 제격이란 생각이다. 

     

     골프 라운딩이 취소돼서 휴가 첫날엔 빗소리를 들으며 책을 읽었고 골프 레슨을 받았다. 그립 다시 쥐고 손 꺾지 않고 내리칠 때 손에 힘 주지 않고 왼 손 꺾이지 않고. 당분간 아이언만 연습하라는 불호령이 떨어졌다. 그래, 이렇게 틈 날 때 연습하면 되지, 뭐. 

     

     거제도 여행 첫날, 고현버스터미널에 내려서 청춘밥상서 모츠나베정식 뚝딱. 근처 상점톡톡에 들러 에어팟 케이스와 엽서를 구매한 뒤 책방익힘으로 향했다. 거제도에 있는 유일한 큐레이션 책방이다. 서점의말들, 코끼리를 쏘다 이렇게 두 권과 함께 라떼를 사서 마셨다. 책방을 연 지는 1년 정도 됐다 하셨다. 어떤 보물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지, 서점을 찬찬히 둘러보는 일이 너무 설레었다. 책을 고르지 못하고 있는 동반자에게 그에 맞는 책을 딱 큐레이션해줬더니 반색한다. 

     바로 지평집으로 향했다. 따뜻한 웰컴티, 라임 차에 몸을 녹이고 땅 밑 깊숙하게 숨겨진 숙소로 발걸음을 옮겼다. 소나기 내릴 때의 흙냄새가 깊게 베일 듯한, 낮은 땅 안에 숨듯이 지어진 숙소. 건축주 박정 대표가 조병수 건축가에 의뢰한 작품이라고. 땅 속에 안긴듯한 포근함을 느끼며 회 한 점마다 웰컴 와인을 홀짝홀짝 마셨다. 

     

     둘째날, 비가 억수로 쏟아진다. 요가를 하고 지평집 카페에서 크로와상 샌드위치와 커피로 마음을 따뜻하게 축였다. 매미성으로 향했다. 태풍 매미로 헐어진 농지를 지키기 위해 농민 백순삼 씨가 쌓은 축대란다. 설계도 없이 그저 농민의 한땀 한땀 치열한 고민으로 쌓아 만든 '작품'이란 게 놀랍다. 근처 해물된장찌개로 점심을 때우고 관포60이란 카페로 향했다. 막 비가 그친 뒤 창 밖으로 보이는 바다. 비건 스콘까지 맛있었다. 

     거제도에 포로수용소가 있단 건 처음 알았다. 인민군 포로 15만 명, 중국군 포로 2만 명 등 총 17만 명의 포로를 수용했다고 한다. '포로'를 위한 공간이 있다는 것도 새삼스럽게 알게 된 사실. 친공포로와 반공포로 사이의 유혈 사태가 수용소 내에 끊임없이 이어졌다고 한다. 계룡산 모노레일 타고 안 보이는 다도해 전경을 품고 다시 안개 속을 뚫고 내려왔다. 명동의 경양식 돈까스집 같은 델리쿡으로 향했다. 그리고 집에서 맥주를 들이켰더니 하루가 다 갔다. 

     

     셋째날, 굿바이 쿠키를 들고 외도 보타니아로 향했다. 다행히 유람선 시간을 잘 맞춰서 갈매기와 함께 흔들흔들거리며 외도에 도달했다. 오는 길에 해금강도 맛 보았다. 해금강은 river가 아니라 바다의 금강산처럼 빼어나다 하여 해금강이란다. 외도는 개인사유지다. 개인이 이 바다 위에 유럽식 정원을 가꾸다니. 해외엔 못가더라도 잠시나마 산토리니에 온 듯한 착각에 빠지기에 충분했다. 겨울연가 마지막 회를 본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막 더워져서 막 시들 듯한 수국을 만나서도 행운이었다.

     물회와 멍게비빔밥을 먹은 뒤 학동흑진부몽돌해변으로 떠났다. 길이 1.2㎞, 폭 50m, 면적 3만㎡ 규모의 해변을 흑진주 같은 몽돌이 가득 채우고 있다. 특히 여름철 이 몽돌밭을 거닐면 지압 효과를 얻을 수 있어 건강에 좋다는데 미처 걷지는 못했다. 아이스아메리카노를 마시며 사진을 찍다보니 어느새 시간이 다 갔다. 

     랜드마크인 풍차가 너무 예뻤던 바람의언덕. 목가적인 언덕에서 석양을 바라보고 있자니 알프스 산에 온듯한 느낌이었다. 비커밍펜션에서 명사해수욕장 근처 수영을 즐겼다. 멕시카나치킨의 불닭까르보나라치킨도 먹을 만했다. 

     

     넷째날, 다소 지쳤다. 하지만 볼 게 넘쳤다. 거제도 자연휴양림에 갔다. 아, 난 이렇게 높디 솟은 나무들이 너무 좋다. 울창한 나무 사이로 햇빛이 삐져나오는 청명한 기운. 일소행 카페까지 어설픈 운전을 해서 편백나무 숲까지 걸었다. 바릇에 들러 해물라면과 딱새우찜을 맛보고 지세포진성으로 향했다. 남방 침입을 막기 위해 조선시대에 쌓은 석성이란 정의는 나중에 알았고 사실 본 목적은 라벤더 꽃밭이었는데 이미 졌다. 그래도 헉헉거리면서 흙을 밟고 오르는 길이 살아있는 기분이랄까. 빈도씨 카페에서 책을 읽은 뒤 다시 수영을 하고 하루를 마무리했다. 

     

     다섯째날, 브리틀리라는 카페에서 악마 페퍼로니 피자와 커피를 마시고 다시 상점톡톡으로 향해 유리잔과 아빠 동백꽃 소주잔을 샀다. 떡메모지 또 득템했다. 브리틀리는 영국인이 운영한다던데 사실 영국사람은 보지 못했다. 동백꽃 알고보니 거제도의 시화더라. 버스터미널에서 유자몽돌빵과 유자쿠키를 사들고 집으로 향했다. 몽돌은 모나지 않고 동글동글한 돌이란 뜻인데,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할지도 되새길 수 있는 돌이었다. 

     

     일단 까먹을까봐 머리 속에 담겨 있는 단상을 막 쏟아내봤다. 볼 게 많은 곳이라 4박 5일이나 머물렀음에도 볼 것이 넘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페에 머물러서 풍경을 바라보고 쉴 수 있어서 충만했다. 내 주장을 모나게 드러내지 않고 더불어 몽돌처럼 잘 살 수 있을까. 모나지 않고 뾰족해지지 않고 바다 같은 큰 마음으로, 지겠단 마음으로. 사실 여행 내내 예민했다고 생각했는데 여행을 마치고 와보니 그리고 오늘 엄마와의 대화를 나눠보니 나는 한결 더 여유로워져 있더라. 다른 사람을 위하는 삶을 살자. 그리고 매 순간 마침표로 살지 말고 과정이라고 생각하고 너그럽게 포용력 있는 삶을 꾸릴 것. 

     

     자, 내일 출근하자. 깊은 얘기는 다시 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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