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bar)캉스가 주는 치유
어제는 한남동의 바(bar)에 다녀왔다. 도착하자마자 이 집 시그니처 메뉴인 피냐콜라다를 먼저 시켜서 마셨다. 화이트럼에 코코넛 그림과 파인애플주스가 섞여서 달콤하다. 잔을 돌리면서 코코넛 가루를 핥아 먹었다. 단 것을 마시니 쓴 것이 당긴다.
Too much of anything is bad, but too much good whiskey is barely enough.
(뭐든지 지나친 건 나쁘다. 하지만 좋은 위스키를 과음하는 건 지나친 게 아니다.)
- 마크트웨인
사실 여기에 온 목적도 위스키였다. 왜 위스키가 먹고 싶었냐고 누군가 물으면 '고독해지고 싶어서'라고 답하겠다. 매일매일 쉽게 마실 수 있는 소주나 맥주 말고 색다른 술이 끌렸달까. 구하기 힘들고 한 모금씩 음미하면서 마실 수 있는 술, 아, 좀 독하고 고급진 술, 그런 술을 갈구했다. 옆에서 미리 위스키를 시켜 마셔던 친구도 한 마디 거들었다.
"이런 술은 드라마에서 회장님이 빡칠 때 혼자 마시는 술이잖아."
그래, 드라마 속 회장님이 되어보기로 했다. 다른 술 시음 끝에 발베니 15년산을 추천 받았다. 노란 보석 빛깔의 액체를 얼음 잔에 조금씩 따랐다. 스트레이트로 먹으면 향을 더 충분히 느낄 수 있지만 얼음잔에 넣어 온더록스(on the rocks)로 먹기로 했다. 위스키의 쓴 맛을 갑작스기보다는 천천히 음미하도록 해주는 역할을, 요 커다란 얼음덩어리가 톡톡히 해내준다. 얼음을 타고 내려간 이 액체를 혀에 갖다 대니, 독하고 쓰고 뜨겁다. 일주일 동안 버겁게 살아 온 내 인생같이 느껴졌다. 그런데 이 액체를 목 뒤로 넘기고나니 쨍한 위로가 찾아오면서 마음이 누그러진다. 치유의 약을 들이킨 것 같은 느낌이랄까. 실제로 위스키는 적어도 16세기까지는 유럽과 미국에선 대부분 '의료용'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강했다고 한다.
여태까지 맛에 대해 이야기했지만 사실 위스키를 찾은 건 '청각적 요소'도 빼놓을 수 없다. 바닥이 두툼하고 뚱뚱한 잔에 큰 얼음을 달가닥 달가닥 거리면서 먹고 싶었달까. 내가 나를 위해 만들어주는 ASMR. 물론 칵테일에도 얼음은 들어간다. 하지만 위스키용 얼음은 더 크고 묵직하다. 잘게 썰은 얼음은 빨리 녹으니까. 칵테일이 '딸그락 딸그락'이라면 위스키는 '달가닥 달가닥' 이라는 소리가 더 맞을 것 같다. 얼음 조각들을 '딸그락' 거리면서 마시는 칵테일은 가볍고 경쾌하고 청량하지만 '달가닥' 거리며 마시는 위스키는 더 무게감이 있다. 실제로 칵테일은 시원하고 상큼하지 않은가. 보드카토닉이라도 보드카와 토닉워터, 레몬을 섞으니까 말이다.
아무튼 바에서 위스키의 맛과 향과 청각을 음미했다. 다른 사람이 먹는 주류나, 바텐더의 술 제조과정을 그냥 멍하니 바라보기도 한다. 발베니 촉각을 느끼고 있을 때 바텐더가 또 하나의 술을 시음하라며 준다. 옥토모어 위스키다. 피트한 향이 입 속에서 강하게 돌았다. 피트(peat)는 몰트(malt, 보리맥아)를 만들 때 연료로 쓰는 토탄 혹은 이탄. '남성이 주로 좋아하죠?' 물었다. 바텐더는 그렇게 생각할 것 같지만 '아니'라고 대답했다. 남성 뿐 아니라 여성들도 많이 즐긴단다. 역시 삶의 씁쓸함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는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1차에서도 술을 어느정도 마신지라 취기가 올라왔다. 얼음이 있어서 망정이었지 스트레이트로 마셨다면 하루키가 '양을 쫓는 모험'에서 말했던 것처럼 진작에 알코올 중독자가 되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아, 한가지 더, 이 바 술을 한 모금씩 다 마시느라 가산을 탕진했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어찌됐든 호캉스 못지않게 도심에서 즐길 수 있는 3시간짜리 '바(bar)캉스'였다. 기진맥진할 때쯤 그런데 내일도 출근해야하는 사면초가인 상황일 때 다시 와야겠다.